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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빛의 파편을 자유롭게 담아내는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

안녕하세요, Sindoh의 신대리입니다.


큐비즘(Cubism, 입체주의)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개척하며 오늘날까지 천재 화가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 원근법을 초월한 다양한 시점이나 기하학적인 표현 방식을 미술로 승화한 그의 작품을 보면 상상력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20세기 문화 아이콘의 상징, 파블로 피카소의 미술과 그 안에 녹아 든 삶의 조각들을 함께 감상해봅시다.




▲ 우는 여인(1937)_테이트 모던



어린 시절의 피카소를 만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렸을 적 그의 화풍은 매우 사실적이고 묵직했는데요. 그가 14살에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 <베레모를 쓴 남자> 속 피사체는 14살의 소년이 그렸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화풍을 보여줍니다.




▲ 과학과 자애(1897)_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



특히 <과학과 자애>의 구도는 피카소의 천재성을 입증합니다. 작품을 보면 환자를 중심으로 선 인물들의 구도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습니다. 피카소가 이로부터 10여 년 뒤, 큐비즘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그림은 묵직하고 클래식합니다.


미술교사 겸 화가였던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13살이 되었을 때 아들의 그림이 자신의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붓을 놓았다고 합니다. 또한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 한 달 안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불과 하루 만에 해치우며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습니다.




▲ 페파 아주머니의 초상(1896)_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



피카소는 14살 무렵부터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을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배움에 목마른 그는 다른 미술가들의 양식 또한 스펀지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 시절 작품 <페파 아주머니의 초상>은 마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인 듯,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인 듯 보입니다. 작품 <첫 영성체>에서 피카소는 놀라운 사실주의 기법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합니다.




▲ 첫 영성체(1896)_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



말년의 피카소는 자신의 예술인생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나이 15살에 난 벨라스케스처럼 그림을 그렸다. 덕분에 나는 80년 동안이나 아이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피카소의 청소년기 작품은 우리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입체파 화가와는 또 다른 피카소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세기의 라이벌, 피카소와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는 미술계를 대표하는 친구이자 경쟁자로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05년 처음 만난 이들은 멘토와 멘티 관계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무려 10년간이나 등을 돌린 절연의 관계로 전락했는데요. 180도 다른 성격 탓에 사사건건 대립하고 서로를 헐뜯기 시작하며 사이가 틀어져 버렸습니다.




▲ 파블로 피카소(왼쪽)와 앙리 마티스(오른쪽)



마티스가 예민하고 신중했던 성격을 지녔다면, 피카소는 정반대로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마티스는 피카소의 콜라주 기법을 비웃었고, 피카소는 마티스의 강박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한 사람의 예술가로써 서로를 존경했습니다.


마티스는 죽기 직전 “내 그림을 피카소 그림과 함께 전시하지 말아 달라.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뜩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라고 그를 향한 마지막 찬사를 내비쳤습니다.




▲ 춤(1)(1909)_앙리 마티스_뉴욕현대미술관



피카소는 마티스가 생을 마감한 뒤에야 “나를 괴롭혔던 마티스가 사라졌다. 나의 그림이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다.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고 고백하며 서로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마티스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진 피카소는 스승의 장례식장을 찾지 못하고 함께 지냈던 때를 회상하며 <캘리포니아 화실>을 작품으로 남기며 그를 애도했습니다.




▲ 캘리포니아 화실(1956)_파리 피카소 미술관



20세기 미술을 도발하다


피카소의 그림은 깨진 거울조각을 통해 굴절되어 보이는 상처럼 보이기도, 깨어진 빛의 파편그 자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선보인 대담한 상상력은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 동시에 의문을 품게 하는데요. 그 의문의 중심에는 피카소가 창시한 미술의 한 부류인 큐비즘이 존재합니다.


큐비즘의 등장과 함께 이전의 미술사조였던 근대미술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현대미술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의 천재성은 20세기를 넘어 21세기 미술까지 지배했고, 그가 지닌 기교와 독창성, 해학이라는 측면은 일반적 미술의 경계를 뛰어넘었습니다.




▲ 게르니카(1937)_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



피카소의 작품은 시각 미술, 영화, 건축 등 모든 장르에 영감을 주며, 오늘날까지 피카소를 세기의 예술가로 칭송 받게 만들었습니다. 피카소가 고집했던 입체주의는 서양화에서 추구해왔던 원근법과 명암법을 초월하며, 아프리카 가면조각과 같은 미개미술에 대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현대 미술사의 고집을 무너뜨렸습니다.




▲ 아비뇽의 처녀들(1907)_뉴욕현대미술관



입체주의의 신호탄으로 평가되고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면 피사체의 모습은 측면형이지만 눈동자는 정면형으로 묘사된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의 인체, 천, 커튼 그리고 배경이 원근법에 구애되지 않고 하나의 면 위에서 뒤섞여 처리되며, 그림 하단에 놓인 과일이 놓인 탁자는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을 담고 있어 여성을 보는 각도와 충돌합니다.





▲ 세 명의 악사(1921)_필라델피아 미술관



기존 통념을 깨는 극단의 단순함은 <세 명의 악사>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절단된 얼굴, 한 개의 눈, 뒤틀린 황소를 머리 삼은 삼각형 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을 보면 선과 형을 극단적일 정도로 단순화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만의 독특한 예술적 집념이 드러납니다.




▲ 풀밭 위의 점심식사(1960)_파리 피카소 미술관



하나의 화폭 안에 여러 시점을 담고자 했던 화가들의 열망을 피카소는 큐비즘으로 탄생시켰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을 통해 화가들은 ‘그림 그리기’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묘사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예술 행위로 인식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19세기 미술에 마침표를 찍으며 20세기 미술에 물음표를 던지며 오늘날까지도 모든 장르의 예술에 모티브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