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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명작 속 숨은 경제학] 모형화, 실체를 보다



경제학자와 화가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거대한 경제흐름 속에서 본질을 발견하고, 화가는 자신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사물이나 현상 속에서 본질을 파악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궁극적으로 본질을 찾아내기 위해 ‘모형화’라는 같은 작업을 거칩니다. ‘모형화’란 무엇이고, 경제학자와 화가의 ‘모형화’ 과정은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지 비교해 보겠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다


과학자는 자연 현상에서 자연의 원리나 법칙을 발견합니다. 경제학자 역시 경제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원리나 법칙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경제 흐름의 주체인 수많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뒤섞여 있는 시장에서 일관성을 찾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현상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경제학자들은 ‘모형화’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형화의 개념


경제학에서 모형화란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제 현상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소거하고 단순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동차의 메커니즘을 알아본다고 할 때, 자동차의 외양을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은 차의 색깔과 형태뿐입니다. 이런 것은 자동차의 본질인 운송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동차의 역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엔진의 구조와 동력장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동차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동차의 본질을 분석할 때는 외관의 특징과 같이 방해되는 요소들은 모두 제외하고 기본적인 동력장치만을 분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동차의 모형입니다. 


즉, 경제학에서 ‘모형화’란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한 경제이론을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개념의 틀입니다. 


경제모형을 만드는 과정 


경제모형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몇 가지의 가정을 세움으로써 일관성 있는 단순화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성립 및 반복되는 단순화 과정 이후에는 반드시 남아있는 부분에 대해 인과관계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추상화’의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경제모형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완전경쟁 시장의 모형’을 보면 몇 가지의 가정을 세움으로써 ‘일물일가의 법칙’이 성립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일물일가의 법칙’이란 품질이 같다면 어느 시장에서든 가격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때의 ‘완전경쟁시장’이라는 개념은 경제학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시장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경제 시장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반해, 모형화 과정 속의 이 시장은 복잡한 현실 속 불필요한 내용은 모두 제외한 채, 본질만 남겨놓은 단순화 된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완전경쟁시장’은 현실적으로 존립이 불가능한 ‘가상의 시장’입니다. 


이렇게 추상화된 모형은 실제의 세계가 아닌 가상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볼까요? 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실의 세계를 더욱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가정을 세우고 단순화 과정을 거친 뒤에 꼭 추상화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잡했던 과정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 현상 ⇨ 모형화 ⇨ 가정 수립 ⇨ 추상화 ⇨ 경제 이론 성립 ⇨ 경제현상분석



폴 세잔 │ 대수욕도 │ 1906 │ 캔버스에 유채



폴 세잔이 보는 세상


폴 세잔, 그는 누구인가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은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에 주목하여 모든 형태를 원기둥과 구, 뿔로 표현하였습니다. 자연을 단순화된 형체로 집약하고, 견고한 색채와 붓 터치로 입체감을 나타내는 독특한 미술기법을 통해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폴 세잔 │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 1890~1895 │ 캔버스에 유채



폴 세잔의 대표작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세잔은 189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다섯 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 중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카드놀이에 몰두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카드 놀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특히 그림 가운데 그려진 기다란 술병은 그 자체로 기준이 돼 그림을 반으로 나누면서 두 사람의 대립과 긴장된 심리상태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 사람, 병, 테이블을 제외하면 특별한 사물이 없는 간결함 때문에 작품 속 두 사람이 시간에 구애 받고 있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폴 세잔 │ 사과와 오렌지 │ 1895~1900 │ 캔버스에 유채



삼각형, 사각형, 원으로 모든 표현이 가능한 그림


일반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은 본질을 찾기 위해 모형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직감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폴 세잔의 추상화 화법은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경제모형의 구성과 무척이나 비슷합니다. 즉, 사물의 본질에는 항상 일관되고 불변하는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잔은 자연 속의 있는 모든 사물의 모양은 삼각형과 사각형 그리고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구와 원통, 원뿔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오렌지는 원으로, 산은 원뿔형으로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세잔은 사물이 갖고 있는 본원적인 구조와 형태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림의 대상이 된 두 사람의 머리와 손은 구로, 모자, 팔뚝, 몸통, 다리는 원통으로 치환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세잔의 단순화 작업은 집착이라고 할 만큼 반복되었고, 이 노력은 날이 갈수록 ‘입체’에 대한 그의 감각을 탁월하고 독보적이게 만들었습니다. 



폴 세잔 │ 생트 빅투아르산 │ 1902~1904 │ 캔버스에 유채



근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의 이런 생각은 이후 피카소나 브라크 같은 입체파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피카소는 세잔을 두고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세잔은 하나의 정물화를 완성하기 위해 100번의 그림을 그렸고, 초상화를 그릴 때는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혔다 일으켰다고 합니다. 경제학자들도 새로운 이론 하나를 성립시키기 위해 무수한 변수들과 씨름해야 합니다. 폴 세잔과 경제학자들의 모형화 형태에서 보듯이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단순해 보이는 결과물과 달리 무척이나 고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탄생하는 것입니다. 





폴 세잔은 생전에 "사물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상주의를 박물관의 미술품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자신의 예술 철학을 밝혔는데요. 수 없이 반복된 단순화 과정을 거쳐 본질을 꿰뚫어 본 화가 폴 세잔과 경제학자들의 통찰력은 비록 그 분야는 다르지만 놀라울 만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경제학자와 화가의 ‘모형화’ 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신도리코 블로그 지킴이 ‘신대리’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