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연재

뉴딜정책, 디에고 리베라와 벽화운동을 일으키다




1929년 미국의 국민들은 경제 대공황으로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가경제 회복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뉴딜정책’을 통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정부는 다양한 고용정책을 펼쳤고 가난한 미술가들도 예외 없이 구제 대상에 포함 시켰습니다. 일자리를 얻은 미술가들은 재능을 발휘하여 벽화운동 ‘뉴딜아트’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뉴딜아트는 성공적이었을까요? 대공황과 뉴딜아트의 상관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대공황의 날, 검은 목요일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뉴욕 월스트리트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일어난 주가 대폭락을 발단으로 미국 전역에 경제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듯 했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해 대량생산된 제품들이 제대로 소비되지 않으면서 기업도산이 속출하였습니다. 결국, 실업률은 30%를 넘게 되었고 실업자의 수 역시 1,5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무료 식사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실직자들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수많은 국민들이 삶의 근거지를 잃었고 무료 급식소 앞에는 빈곤에 놓인 사람들이 줄을 지어 수프나 커피를 배급 받고 있었습니다. 불황의 여파는 곧 유럽으로 확산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산업화를 겪고 있던 다른 국가에서도 실업과 생산 감소가 잇따랐습니다.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출처: 위키피디아)



1932년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대공황의 원인과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후보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대공황을 극복하자는 ‘뉴딜정책’을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습니다.



뉴딜 정책, 벽화를 탄생시키다


뉴딜정책은 다방면에서 수립됐습니다. 금융•재정 분야에서는 은행에 대한 정부통제를 확대하였고, 관리 통화제를 실시하여 금융안정성을 꾀하였습니다. 건설 분야에서는 테네시 강 유역개발공사와 같은 대규모 개발사업을 추진하여 일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농업 분야에서는 판매되지 않아 넘치고 있는 농산물을 정부가 직접 사들여 생산량을 조절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알링턴 우체국의 벽화 │ 윌리엄 파머 │ 1938 │ 벽화



루즈벨트 정부의 실업 구제 정책은 연방 극장 프로젝트, 예술 프로젝트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정부는 1933년 12월부터 1934년 6월까지 본격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운영했습니다. 이를 통해 3,700여 명의 미술가들이 일자리를 갖게 되었고, 이들은 대형벽화, 그림, 조각, 포스터와 같은 그래픽 아트로 미국 곳곳의 공공건물과 공원을 장식했습니다. 


루즈벨트 정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멕시코 벽화 운동을 적극 실천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프로젝트였습니다. 1910년, 멕시코는 ‘멕시코 혁명’ 이후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국민들은 불안감을 이겨내고자 다 함께 손을 잡았고 예술가들 역시 국민들과 뜻을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미술관을 벗어나 만인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공공장소에 벽화 예술을 펼쳤습니다. 그 중심에 디에고 리베라가 있었습니다. 




 멕시코 벽화운동을 이끈 디에고 리베라 (출처: 위키미디어)



뉴딜 정책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역시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미술관에 갈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는 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멕시코 벽화 운동을 눈 여겨 보았던 미국 정부와 기업은 디에고 리베라를 미국으로 초청하였고, 초청을 수락한 그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벽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 │ 디에고 리베라│ 1932-33 │ 프레스코



뉴딜 정책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자동차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의 시립 미술관 DIA(Detroit Institute of Arts)에 그린 일련의 벽화들입니다.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라고 불리는 이 벽화는 당시 포드 자동차회사의 사장이던 에젤 포드의 주문에 의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벽화의 중심이 되는 북쪽 벽과 남쪽 벽 가운데 하단의 그림들은 당시 디트로이트 산업의 구심점이던 포드 자동차회사의 생산 현장을 역동적이고 힘차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벽화운동에는 있고, 미국 벽화운동에는 없는 것




 Epic of the Mexican People-Mexico Today and Tomorrow│ 디에고 리베라 │ 1929-35 │ 프레스코



디에고 리베라를 포함해 멕시코 벽화운동을 주도했던 예술가들은 벽화를 통해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벽화에 뚜렷하게 그려내어 국민들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리베라가 멕시코 중앙정부청사 팔라시오 나시오날에 그려 놓은 벽화를 보면 형태와 색채가 대담하고 멕시코의 과거와 비전을 담은 정치적 메시지가 강렬하게 담겨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을 모는 레이첼 실버턴│ 존 보샹 │ 1938 │ 벽화



반면, 뉴딜 벽화는 미국과 관련된 향토적 정체성을 살려야 한다는 제한조건 아래에서 작품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말을 모는 레이첼 실버턴>처럼 온건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도발적인 부분이 있으면 주민들은 항의를 했고, 반발에 부딪힌 작품들은 보다 건전한 모습으로 수정되곤 했습니다. 정부와 주민들의 개입은 예술 그 자체의 표현을 제한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뉴딜 아트 작품들은 질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한 미국의 벽화운동은 결국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미국 경제가 전시 경제로 돌입하면서 뉴딜정책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여파가 뉴딜아트에도 미치게 된 것입니다. 뉴딜아트는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간주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뉴딜아트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문화가 가지는 사회재생능력의 가능성을 제시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이한 2009년, 한국에서도 뉴딜아트를 모방한 한국형 ‘예술뉴딜정책’이 시행됐습니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전시해 예술 거리를 조성했습니다. 그러나 지역민들과의 소통이 결여된 채 반강제적으로 진행되어 오히려 갈등만 조장한 채 성과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또한 실업자 구제 정책적으로도 환경적, 도시재생적인 면을 고려하지 못해 장기적인 고용 창출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멕시코의 ‘벽화운동’은 성공하고 미국의 ‘뉴딜 아트 정책’과 한국의 ‘예술뉴딜정책’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진정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란 예술이 품은 사회적 메시지, 예술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는 즐거움, 환경적•도시재생적으로 지속 가능한 변화 창출 이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야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