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유럽 권력자들의 초상화에는 지구본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림 속에 그려진 지구본에는 권력자의 야심,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던 대항해 시대, 경제적 중상주의 등 다양한 시대적 배경이 함축되어 있는데요. 지구본이 담고 있는 과거 유럽의 모습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초상화 속 지구본과 대항해 시대
에스파나 선단을 이끌고 출항한 이탈리아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권력자들 사이에서는 초상화에 지구본을 그려 넣는 현상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본과 세계지도는 당시 대항해 시대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초상화에 지구본과 세계지도를 그려 넣음으로써 대륙 정복에 대한 야심을 표출했습니다.
▲ 대사들│한스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unger)│1533│오크 패널에 유채
독일 르네상스 대표 화가 한스 홀바인 2세가 그린 <대사들>에서도 지구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당시 영국에 와 있던 외교관들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 속에 그려진 지구본의 상징성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교를 펼치는 외교관들의 직업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속 탁자를 자세히 보면 지구본뿐만 아니라 천문 관측 기구들도 놓여있습니다. 가장 오른쪽 상단에 있는 것은 트레케튬으로 별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입니다. 그 사이에는 원기둥 형태의 휴대용 해시계, 하얀 부채꼴의 사분의, 다면체 해시계 등이 놓여 있습니다.
지구본과 다양한 종류의 천문 관측 기구들은 모두 수학과 천문학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항해와 같이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인데요. 초상화에 그려진 소품들은 두 외교관의 학식과 직업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당대가 활발한 항해의 시대인 것까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대사들>의 지구본 부분
작품을 그린 홀바인은 그림에 상징적인 의미를 담았을 뿐만 아니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작품의 완성도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그림 속 지구본을 거꾸로 돌려서 확대해보면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서양과 아메리카의 일부도 보입니다. 정교한 묘사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항해 시대가 낳은 중상주의
초상화에 그려진 지구본이 갖는 의미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림 속 지구본은 군주들의 경제적 중상주의 추진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중상주의란 금, 은, 화폐 보유량에 따라 나라의 국부가 결정된다는 경제이론입니다.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을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부의 기본으로 보았기 때문에 초기의 중상주의는 외국으로부터의 금, 은 유입을 장려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유럽 각국의 경쟁적인 식민지 정복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 왕립과학원의 회원들을 루이 14세에게 소개하는 콜베르
│앙리 테스틀랭(Henri Testelin )│1667│캔버스에 유채
한편, 17세기 이후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중상주의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중상주의 정책은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관료인 장 바티스트 콜베르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었습니다. 콜베르는 단순히 금, 은의 유입을 장려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역의 차액으로 국가의 부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무역에서 흑자를 낼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자국 업체들이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콜베르는 전문 기술을 가진 외국 근로자들의 유입을 환영했고 반대로 자국 기술의 유출은 엄금했습니다. 또한, 몇몇 제조업체와 무역업체들에게는 특혜를 주어 외국 기업보다 앞선 상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프랑스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정부의 통제아래 강력한 보호무역을 실시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편중된 특혜 제공과 엄격한 진입 규제는 특혜 바깥에 있는 업체들의 불만을 낳았고 자유로운 경쟁의 기회를 앗았습니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구본│마르틴 베하임(Martin Behaim)│1492
콜베르가 강력히 추진한 중상주의 정책은 훗날 애덤 스미스와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로부터비판 받았습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자유로운 무역이야말로 효율적인 국제 분업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주의 경제 정책은 고전학파가 주장한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에 밀려 점차 쇠퇴했습니다.
자유방임주의 vs 중상주의
중상주의 사회에서는 화폐와 귀금속의 보유량으로 국력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국가에 재화는 없고 돈만 가득할 때 그 돈이 과연 효용가치가 있을까요? 화폐는 어디까지나 재화의 뒷받침을 받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화의 생산을 증대 시킬 수 있는 ‘생산량이 높은 국가’가 국부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마다 특화된 생산 분야가 있습니다. 가령 한국은 반도체나 자동차 생산 산업에 특화되어 있고 호주는 소고기, 섬유 생산 산업에 주력합니다. 한 국가에서 모든 물건을 생산하려고 하면 전체적인 생산량은 줄어듭니다. 각 국가마다 가장 높은 생산량을 가진 분야에 집중하여 최대의 산출량을 얻은 후 이것을 자유롭게 거래하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출은 촉진하고 수입은 억제하여 국부유출을 막으려 했던 중상주의는 완전히 낡은 사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경제는 위기나 불황이 닥칠 때 마다 중상주의 정책과 같이 국부유출을 최소화하는 보호무역을 내세우며 경제 불황을 타개하곤 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중상주의가 국내 산업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산업 간 균형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가 개발 단계에 있을 때도 필요한 이론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초상화 속에 그려진 지구본 그림에는 15~18세기에는 대항해 시대와 초기 상업자본주의 시대 당시 유럽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전 명화에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오브제가 많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안다면 어떤 명화라도 조금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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