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연재

동서양의 서로 다른 방어작전이 만든 건축 <만리장성 Vs. 아피아가도>



건축은 공간의 의미를 넘어 그 시대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삶의 방식과 함께 오랜 시간 한 자리에 머물며 역사의 한 축이 됩니다. 건축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건축은 사람들이 지나온 삶을 들어다 볼 수 있는 통로’라 말하기도 하죠.


신도리코 블로그는 문화•예술 분야의 다양한 소식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건축에 특화된 글을 오랫동안 게재해왔는데요. 2017년에는 세계의 유명한 건축을 통해 건축의 미학과 역사를 살펴보는 ‘세계건축기행’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그 첫 편으로 중국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아피아가도’를 소개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여 년 전, 세계는 침략하고 침략 받는 전시상황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뺏고 빼앗기는 역사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은 동서양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벽을 쌓아 올려 자신을 보호했던 중국과 밖을 향해 한없이 길을 냈던 로마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부국강병을 위해 치열하게 만들었던 두 건축물이 담은 역사와 현대에 미친 영향을 소개합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Fruggo



고대 문명을 품은 군사 요새, 만리장성


기원전 221년 한, 위, 조, 연, 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운 진나라 시황제는 흉노족을 방어할 목적으로 북방 지역에 최초로 장성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공사는 시황제 시절 1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몇 백 년 동안 이어질 공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흉노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시황제에 이어 한나라 황제, 무제도 장성 공사를 이어나갔습니다. 한나라 이후에도 북위와 수, 요, 금나라 등에서도 장성을 복원하고 늘려 지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것입니다. 명나라 최초의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왕위에 오른 첫해인 1368년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200여 년 동안 18차례의 대규모 공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완성됐습니다. 동쪽 랴오둥에서 서쪽 린타오까지 건설된 장성의 길이는 4,050km로 중국의 거리 단위로 따지면 무려 만 리가 넘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Asadal



만리장성은 설계와 시공에 있어서 당시 군사 전략가와 시공자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성벽은 산줄기의 높낮이에 따라 넓고 좁게 건설되었습니다. 공사한 시기와 위치에 따라 다양한 건축자재를 이용했습니다. 계급에 따라 초소와 숙소를 다르게 건설한 것 역시 독특한 점으로 꼽힙니다.


장성에 오르는 초입에는 마오쩌둥의 ‘부도장성 비호한(不到長城 非好漢)’ 이라는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성인이 되는 남자들은 반드시 이곳 만리장성에 올라봐야 한다는 뜻인데요.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징발되어 평생 만들어낸 만리장성의 숭고함과 교훈을 기리기 위해서 남긴 글입니다.


장성은 대부분 높고 험준한 산정(山頂)을 따라 지어져 장관을 이룹니다. 현재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은 명나라 때 지어진 팔달령, 사마대, 무전욕, 금산령 등 여러 곳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 팔달령 장성은 만리장성을 가장 잘 볼 수 있어 관광객에게 제일 인기가 많습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Asadal



팔달령 성벽의 높이는 8.5m, 윗부분의 너비는 5.7m에 달해 이를 본 사람들은 ‘웅장함의 극치’라 표현하곤 합니다. 매표소 입구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이 여판(女坂)이고, 왼쪽이 남판(男坂)인데 남판 쪽이 오르기 더 힘듭니다. 현대에 와서는 관광객을 위해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를 설치했습니다.


만리장성은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입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장성을 쌓기 위해 돌을 하나하나 나르고 얹으며 희생된 군사와 백성의 수가 지구 한 바퀴를 돌 정도로 추정됩니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역사뿐 아니라, 희생된 이들의 고난과 애환을 느낄 수 있어 중국인에게도, 외국 관광객에게도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아피아가도


지구의 동쪽에서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기원전 312년경, 서쪽에선 로마의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최초로 건설된 로마의 길은 로마의 감찰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사용한 군사도로, ‘아피아가도’라 불렸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라는 말의 유래가 된 길이기도 하죠.


고대 로마 군대는 전장에서 퇴각할 경우,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기지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기지는 전장에서 바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릴 수 있도록 많은 수의 로마군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기지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수도인 로마에서 빠르게 물자공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 군사적 물자 교류를 위한 중심 도로, 아피아가도가 건설됐습니다.


이 가도는 아피우스가 도로 건설을 제안하고 직접 통솔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어졌지만 사실 수많은 로마 공병대들이 닦은 길입니다. 초기의 로마 군대는 로마 시민으로 구성됐습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며 전시에는 병사로 활약하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들 중 공병대로 발령된 시민들은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만드는 일을 주 업무로 하였습니다. 





▲ 출처: 위키미디어 @Kleuske



로마의 공병대가 닦은 길은 실로 견고합니다. 우선 지면을 1~2m 파 내려가 그 위에 모래를 깔고 롤러로 다진 후, 다시 그 위에 30㎝ 정도의 자갈을 깔고, 또 그 위에 주먹만 한 돌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호두알 만한 자갈을 깔았습니다. 그 자갈은 몰타르로 접합되어 틈새가 전혀 없어 견고한 도로를 유지해줍니다. 마지막으로 그 돌 위에는 또다시 자갈과 모래를 깔았고, 끝으로 크고 평평한 돌을 깔았습니다.


로마인은 ‘길은 직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에 굴을 뚫기도 했고, 골짜기에 높은 다리를 놓는 어려운 공사를 벌이기도 하여 못 가는 곳이 없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로마인이 만든 길은 위급 시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외국의 침략을 막는 기동성을 가져왔고 각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로마를 발전시키는 외교적 측면에도 기여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최초의 수출품, 비단이었습니다. 가볍고 광택이 나는 데다 몸을 휘어 감는 비단의 질감은 로마인을 매혹시켰죠. 로마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는 비단이 퇴폐 문화를 조장한다며 금지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식민지를 포함한 전 영토에 걸쳐 구축된 도로망 덕분에 로마인들은 군대의 이동과 물자교역, 나아가 거대한 제국의 안정 유지와 균형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아피아가도의 일부 구간은 오늘날에도 남이탈리아의 연결로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남아있습니다. 현대와 같은 기술과 기계와 없을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을지 새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주변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안으로 견고한 성벽을 쌓은 중국과 식민지 진출을 위해 도로를 만든 로마의 모습은 사뭇 대비됩니다. 두 건축 만리장성과 아피아가도를 통해 동서양의 사고방식과 그 시대상을 상상해보면 더욱 재미있겠죠? 다음 달에도 흥미로운 건축 이야기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