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인간에 의해 생겨나지만, 인간으로 인해 멸망하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재난이 일어날 때 피난 가면 안전한 열 군데를 일러 십승지(十勝地)라고 불렀는데요. 폴란드의 도시 ‘크라쿠프’도 십승지 같은 행운을 지닌 곳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 항구도시 ‘르 아브르’는 정반대 운명에 처한 도시로, 현재는 완전히 달라진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건축 역사를 통해 보는 두 도시의 상반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비극을 피해간 운 좋은 도시, '크라쿠프'
수많은 문화유산과 현대적인 것이 조화를 이루는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입니다. 크라쿠프는 폴란드 제2의 도시로 1038년부터 1596년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로 번성을 누렸으며, 13〜16세기에는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와 더불어 중부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만큼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세워졌고, 폴란드인은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현재도 중세 시대 교회 58개를 비롯해 수백 개의 역사적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사령부가 있다는 이유로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아 중세시대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 크라푸트 메인 광장 (출처: 위키백과)
크라쿠프가 어떤 곳이기에 독일군이 그곳에 사령부를 둔 것일까요? 크라쿠프는 1596년 폴란드 왕국이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왕의 대관식을 치른 역사적 정통성을 간직한 유서 깊은 도시로, 폴란드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했던 히틀러는 이곳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정복하려 했습니다.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크라쿠프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히틀러는 탱크부대를 앞세워 폴란드 곳곳을 정복하며 국토 대부분이 폭탄으로 파괴되는 상황에서도, 사령부가 있는 크라쿠프만은 어떤 것도 건들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에 연합군도 폭격을 자제했고 그 결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크라쿠프는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크라쿠프는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에 유네스코는 이러한 역사성을 높이 평가해 1978년 크라쿠프를 세계 12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으며, 2000년에는 유럽의 문화도시로 선정했습니다.
▲ (좌) 크라쿠프를 대표하는 주황색 성곽인 바벨성
(우) 과거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불던 나팔을 요즘도 여행자들을 위해 매시간 불고 있다
크라쿠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인 중앙시장 광장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과거 외세의 침임이 많았던 크라쿠프는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성당 꼭대기에서 나팔을 불었는데요. 이것이 유래가 되어 요즘도 매시간 마다 직접 나팔수가 나팔을 붑니다.
이밖에 높은 주황색 성곽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바벨 성은 크라쿠프의 주인답게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바벨 성은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가미된 건축물로, 1000년 크라쿠프 주교에 의해 처음 지어졌습니다. 바벨 성 안쪽에는 성 외에 여러 군데의 공원과 바벨 대성당 등 볼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합니다.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태어난, '르 아브르'
‘신의 은총을 받은 항구’라는 뜻을 가진 도시 르 아브르(Le Havre)는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도시로 대서양 연안 특유의 자연환경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19세기에는 전통적 표현에 식상함을 느낀 많은 화가들이 찾아 머무른 곳으로, 예술적 영감을 준 곳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적인 작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유년 시절 르 아브르에서 인상파의 선구자로 불리는 외젠 부댕(Eugene Boudin)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르 아브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며,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르 아브르 항구를 배경으로 작품을 남길 만큼, 르 아브르는 인상파 작가들의 고향 같은 곳이었습니다. 르 아브르는 교역 항구로도 인기가 많은 곳이었는데, 신대륙 탐험선 출발지이자 세계 각국 무역선의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과 가까워 양국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항구의 활기와 따사로운 햇볕, 찬란한 해변의 여유가 공존하는 곳이었죠.
▲ 클레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하지만 행복도 잠시, 르 아브르를 누가 질투라도 하듯 제2차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냈습니다. 노르망디 해안을 둘러싼 공방전이 벌어졌고, 연합군과 독일군이 번갈아 르 아브르를 폭격했습니다. 그 결과 주요 시설과 건물이 모조리 파괴당해 도시의 80% 이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눈부시게 활기차고 아름답던 도시에서, 순식간에 폐허가 된 르 아브르를 다시 일으킨 건 프랑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르 아브르를 재건하기 위해 건축가인 오귀스트 페레에게 진행을 의뢰했습니다.
▲ 르 아브르 해안가 전경 (출처: 위키백과)
이에 페레는 한정된 예산 속에서 1만여 가구 이재민의 주거 문제까지 해결하는 획기적인 건축을 선보이며, 도시의 전통은 살려내면서 현대적인 건축물로 르 아브르를 채워나갔습니다. ‘콘크리트의 시인’으로 불렸던 페레는 획기적인 건축 조립법과 콘크리트 활용을 통한 새로운 건축물을 선보였습니다. 6m 24cm 길이로 공간을 모듈화한 아파트는 페레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르 아브르 도시의 상징인 시청
페레를 통해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새롭게 재탄생한 르 아브르는 현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프랑스 항구 도시 르 아브르는 건축학도라면 꼭 한번 들려야 하는 건축 도시로 명성을 떨치며, 실제로 세계 건축 학도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같은 전쟁의 시기를 겪었지만 역사의 흐름에 따라 두 도시의 운명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르 아브르는 후세의 손로 다시 태어나게 됐죠. 결국 건축의 역사는 그것을 가꾸고 지켜나가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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