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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곡선의 아름다움을 건축물에 입히다 <르 코르뷔지에 vs 안토니 가우디>



19세기의 건축물은 자로 잰 듯 네모 반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20세기 건축물은 공간형태가 파격적으로 해체되고 자유로워진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와 20세기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유럽에 미친 영향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르 코르뷔지에’와 자연주의적이고 강한 개성을 지닌 ‘안토니 가우디’, 닮은 듯 다르게 20세기 건축의 포문을 연 두 건축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합리주의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 



▲ 현대 건축에 큰 공헌을 한 르 코르뷔지에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의 시계 산업 중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계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시계 장식과 조각 공예를 배우는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의 그림 실력을 눈여겨본 스승은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해 끊임없이 건축가의 길로 부추겼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 젊은 건축가 샤팔라 밑에서 건축을 배운 그는 미술에 타고난 소질 덕분에 건축설계 기술을 금세 터득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열일곱 살에 첫 작품으로 팔레 주택을 설계했습니다. 이를 본 스승은 다시 한 번 제자의 천재성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재능을 펼칠 것을 제안하며 유럽여행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팔레 주택을 설계해 받은 돈으로 첫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건축과 조각을 보면서 깊이 감동했고, 건축과 도시에 관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구축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고 선언하는 등 철저하게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신봉했습니다. 건축의 합리적·기능적 조형을 중시하여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주택, 공공 건축, 도시 계획을 발표했고, 기능이 중심이 되는 건축을 지향했습니다. 그의 저서에서도 기능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합리적인 계획이념이 넘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20세기 최고의 걸작 롱샹 성당



하지만 ‘롱샹 성당’은 달랐습니다. 롱샹 성당은 그의 주장과 건축 이념으로부터 일탈하여 다소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당이 지어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합리주의 건축의 대표주자인 르 코르뷔지에가 가장 비합리적인 건축물을 지었다고 비난했고, 어떤 이는 표준과 합리성을 넘어선 새로운 시도라고 극찬했습니다. 


비록 논란이 되긴 했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인 건물로 평가되는 것은 ‘롱샹 성당’임에 틀림없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기존의 성당 자리에 작품을 의뢰 받은 그는, 작품의 창의성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서야 설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기존의 성당 모양을 타파한 놀라운 건축 형태를 창조해냈습니다. 


성당은 규칙 없이 굴곡을 이루는 특이한 조형입니다.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파도를 뚫고 항해하는 함정의 모양 같기도 하고, 두 손을 곱게 모으고 기도 중인 손 같기도 하며, 물 위에 평화롭게 떠 있는 오리 같기도 합니다. 



▲ 독특한 창문들이 나열되어 있는 롱샹 성당



여러 모양과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유는 해변에서 발견한 ‘게 껍데기’와 같은 자연물에서 영감을 얻어 외관을 디자인했기 때문입니다.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이 성당에서는 직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평면을 봐도 모든 선은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당의 곡선들은 주변 자연 풍경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성당이 서 있는 둥근 언덕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곡선들은 외관뿐 아니라 내부로 연장되어 그 멋을 자랑하고, 심지어 바닥마저도 만곡을 그려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 신비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롱샹 성당 내부



내부로 들어가면 다소 어둡게 느껴지는데, 자연 채광만을 이용하는 목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롱샹 성당은 200여 명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습니다. 그러나 현대 건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역사성과 시대성, 예술성과 종교성 등을 잘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성당을 보기 위해서 매년 8만여 명이 순례자처럼 롱샹의 언덕을 오릅니다. 롱샹 성당은 다양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의 상상 날개를 펼치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스페인이 낳은 자연주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스페인의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인물 안토니 가우디



안토니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카탈루냐의 작은 마을에서 구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그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뒤 바르셀로나에서 개업을 했지만 찾아오는 고객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세공 솜씨를 이용해 건축물 대신 독창적인 진열대를 만들어 만국박람회에 출품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엄청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에우세비오 구엘은 그를 후원하였고, 구엘을 위해 그는 ‘구엘 저택’을 설계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비센스 저택, 엘 카프리초, 칼베트 저택 등 많은 건축물을 짓고, 후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 가우디는 자연과의 조화를 가장 중요시 하고 모든 영감을 자연에서 얻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마르지 않는 교과서였습니다. “나는 꽃,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닭 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곤충들의 날개소리를 들으며 프라데스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상쾌한 이미지를 얻는다.”라고 말한 데서 그의 신념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독창적 자연주의 아이디어를 접목한 모습



그는 자연이 인공물과 구별되는 본질적인 특성은 부드러운 ‘곡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곡선의 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건축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그만의 독창적 자연주의 아이디어를 접목한 작품입니다. 첨탑은 옥수수를 닮았고 각종 조형물은 지중해 식물과 과일 모습 그대로이며 색채와 형태 또한 아름답습니다. 


그는 성당을 지을 당시,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머물면서 건축에만 몰두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습니다. 자신의 작업에만 온전히 사로잡혀 금욕주의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120m 높이의 탑이 완성되었을 때 이 탑은 바르셀로나의 마천루가 되었습니다. 



▲ 안토니 가우디의 아름다운 건축물 모습



그는 7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성당 건축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성당 건축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후 다른 건축가들에 의해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1936년 스페인 내란으로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1952년 건축이 재개되어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희대의 건축물에 대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건축물 중 하나’, ‘인간이 만든 최고의 조형물’,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고 평합니다.



▲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역사적 상징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 전경



안토니 가우디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세기말 사상, 혹은 새로운 세기의 사상으로 넘치는 시대였습니다. 문화적,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스페인의 역사 한복판을 살면서 그는 자기 생각을 건물에 담았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안토니 가우디에서 시작됐지만 각기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다른 세대의 기술들이 사용된 건축물이며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상징입니다.


르 코르뷔지에와 안토니 가우디는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 건축가였습니다. 합리주의를 좇았던 르 코르뷔지에와 자연주의를 추구했던 안토니 가우디는 닮은 듯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건축가와 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노력이 깃든 롱샹 성당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모두 극찬을 받아 마땅한 예술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