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두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와 같이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었지만 지금은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독일의 베를린과 거대한 불덩이와 화산재에 묻힌 후 발굴되어 고대 로마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폼페이입니다. 현재, 도시 재건·복원 사업을 통해 찬란하게 빛났던 시기를 재조명하고 있는 두 도시를 소개합니다.



베를린 왕궁 복원 사업으로 엿보는 독일의 오늘



▲ 동서화합의 상징이 된 베를린



베를린(Berlin)은 19세기 말 독일 카이저 제국이 독일을 통일한 이래로 제국의 수도로서 정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포츠담 협정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관리하는 서독 지역과 소련이 관리하는 동독 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1961년 8월, 베를린 사이에 43.1㎞에 이르는 콘크리트 장벽인 일명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베를린을 동서로 갈랐던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해 냉전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통일과 더불어 동서화합의 상징이 된 베를린은 통일 시대에 걸맞은 수도를 만든다는 계획에 따라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분단의 잔재를 지우고, 유럽의 중심 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미래 사업 계획의 일환인 것입니다.



▲ 베를린 왕궁 재건 프로젝트를 알리는 훔볼트 박스



공사가 진행되는 여러 곳 중 베를린 한복판에 있는 ‘훔볼트 박스(Humboldt-box)’가 눈에 띕니다. 베를린 대성당 앞에 유리상자 같이 생긴 투명한 팔각형 건물로, 2012년 베를린 왕궁 재건 예정지에 재건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베를린 왕궁 재건이 완료되면 사라질 예정인 홈볼트 박스에는 베를린 왕궁 건설 현장을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건축 박물관, 전시장, 레스토랑 등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에 띄는 건물을 세워 베를린 왕궁 재건 프로젝트를 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5세기에 지었던 베를린 왕궁은 프로이센 제국의 심장부 역할을 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입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은 이 건물에 폭격을 퍼부어 처참한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동독 정부는 봉건주의의 잔재,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철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왕궁 자리에 동독의 정부청사인 공화국궁전을 세웠습니다. 독일 정부는 통일 후 과거의 어두운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 건물을 헐고 왕궁을 복원하려 시도했습니다. 



▲ 정치와 역사, 문화가 공존할 베를린 왕국 재건 현장



그러나 옛 동독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공간의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종종 현대 미술 전시회장으로 사용되면서 이 건물의 철거에 반대하는 서독 지역 사람들마저 늘어났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프로이센 왕국은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많은 돈을 들여 복원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농기구회사를 운영하던 빌헬름 폰 보딘 이사는 1991년 ‘베를린 왕궁 복원협회’라는 민간 모임을 결성했고, 베를린 왕궁 복원은 점차 독일사회에서 큰 이슈가 됐습니다. 보딘 이사는 “선대의 건축 유산을 재건하는 일에는 이성에 의한 손익 계산을 초월하는 감성적 가치가 있다”며 베를린 왕궁 복원을 주장했습니다. 


2002년 독일의회는 마침내 베를린 왕궁 복원 사업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2008년 동독 정부청사였던 공화국궁전이 철거되면서 왕궁 복원 사업은 비로소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계획 실무는 이탈리아 건축가 프랑코 스텔라가 맡았고, 외관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내부 공간은 미술관으로 쓸 계획입니다. 단순히 정치와 역사적인 공간이 아닌 문화적인 공간으로 복원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화산 잿더미가 보존해준 시간 여행지, 폼페이



▲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고대 도시 폼페이



고대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 문화에 이르기까지 번영했던 폼페이(Pompeii)는 79년 8월,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졌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며 내뿜은 화산재와 암석 조각이 폼페이 시가지 전체를 뒤덮었고, 번성했던 도시는 두께 2~3m의 화산재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로마 제국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 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습니다. 폼페이는 항구를 낀 농업·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습니다. 기후와 토질이 좋아 농업도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폼페이는 로마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하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던 폼페이는 화산 대폭발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기록 속에서만 존재하던 폼페이는 1599년 수로 공사를 하면서 발견되었고, 173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 찬란했던 폼페이의 문화를 알 수 있는 벽화



폼페이가 전반적으로 재건된 시기는 1950년대 전후였습니다. 2차 대전 이후 경제적 난관 속에서 임시로 진행된 바 있었던 복원은 오히려 고고학적 유적을 더 빠르게 파손시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기 나폴리 고고학 유산을 관리하며 문화재청에서 일한, 폼페이 고고학 박물관장 마이우리(Amedeo Maiuri)와 데 프란치시스(Alfonso De Franciscis)는 문화유산 정책을 ‘발굴’에서 ‘보존’으로 선회했습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입니다.


복원 중에는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자료들은 폼페이가 상당히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즐겼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천 년간 화산재 속에서 전승된 사료가 발굴 되어도 관리 소홀로 소실되곤 했습니다. 덕분에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이것이 후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폼페이는 1997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관심도 이끌어냈습니다.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나폴리 문화재 관리국은 1998년 지자체와 문화재청의 재원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관리체계를 도입했습니다. 그 후, 성과 위주의 단기적 발굴에서 벗어나 중장기적 기획안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 폼페이 유적지에서 복원한 발굴품



또한 2004년 ‘문화재와 경관에 대한 법령’은 고고학 발굴지에 대한 정의를 확장했습니다. 이 법령은 문화재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상문화유산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008년에는 ‘나폴리와 폼페이의 고고학 유산을 위한 특별 관리국(SANP)’이 설립돼 2010년부터 ‘폼페이의 그란데 프로젝트(Grande progetto di Pompei)’가 실시됐습니다. 이 프로젝트로 문화유산 관리에 대한 평가, 복원·보존, 데이터 공유 등을 유기적인 사회망 속에서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폼페이 유적지는 고대 로마 귀족들의 삶과 휴양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특하게 꾸며진 주택과 그곳에 장식된 벽화, 동상, 모자이크,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했던 장소 등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폼페이는 매년 500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들 때문에 유적지와 유물이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폼페이는 한가로운 일상을 한 순간에 참극으로 몰아넣은 급작스러운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도시의 파괴가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온 인류가 함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 화산재 속에 잠들어 있었던 폼페이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닮습니다. 건물과 길목에 내려앉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는 도시의 내일이 됩니다. 베를린과 폼페이의 사례는 우리에게 도시와 인간의 삶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변화와 진화를 거듭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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