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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직장인 고민상담] 마음을 숨지기 마세요. 감정은 언제나 옳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병수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은 어떤가요? 각자 나름의 고민 요소가 있을 텐데요. 신도리코 기업 블로그를 통해 직장에서 부딪치는 일과 스트레스의 본질을 밝히고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직장 내 감정표현의 올바른 방향입니다.



직장에선 마음을 숨기는 것이 답일까요?


소심한 성격에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 하겠다며 고민 상담을 신청한 여성 직장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도 싫다는 말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솔직한 감정을 숨겨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반대하지 않았고, ‘이건 싫고, 저건 마음에 안 드는데’ 라고 느껴도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더욱이 직장 동료와 상사는 "00씨 얼굴 보면 도대체 속을 모르겠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라며 자신을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합니다.





감정 표현, ‘나’라는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 표현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감추려는 심리에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내 진짜 감정을 들키게 되면 나는 거부 당하고 말거야’ 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감정을 숨기고, 타인의 의견에 동조해주면 인간 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솔직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관계도 좋아지고 직장 생활도 원만해질까요?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색 무취의 맹물처럼 지내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장은 갈등을 피할 수 있고, 얼굴 붉힐 일도 줄어들겠죠. 하지만 맹물처럼 자기 감정 숨기고 살다 보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리 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나'라는 사람의 사회적 존재감은 사라져 버립니다. 흐르는 물처럼, 자기 경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죠. 싫고 좋음의 선명한 자기 색깔을 드러나지 않는다면 ‘나’의 사회적 정체성도 흐려지고 맙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감정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솔직한 표현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속을 모르겠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뢰를 쌓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죠. '뭔가 다른 생각을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며, 괜한 의심을 품게 됩니다. 이쯤 되면 직장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도 어려워집니다. 여러 심리학 연구 결과를 통해 볼 때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인간 관계가 더 좋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으로부터 정서적 지원도 잘 받아들이고, 삶의 만족도도 훨씬 높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몰라, 감정표현불능증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감정표현불능증’이라고 합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이 있는 사람은 감정을 억누릅니다. 감정을 언어화하지 못합니다. 내면에 쌓인 감정은 신체 증상으로 표출됩니다. 스트레스성 두통이나, 스트레스성 위장장애의 근본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감정표현불능증입니다. 유독 우리나라에 화병 환자가 많은데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억눌러 두여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 화가 난다고 소리 지르고 슬프다고 엉엉 울어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상황에 맞춰 잘 표현하면 인간 관계에도 도움이 되고, 정서적으로 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솔직한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의 직장 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객이 뭐라고 하던 웃는 얼굴로 응대해야 하고, 동료가 무례하게 행동해도 회사 분위기 망치지 않으려고 속으로 분을 삭혀야 할 때도 있죠. 상사가 질책해도 약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척도 해야 하고요. 이 모든 것이 감정 노동에 해당합니다. 실제 느낀 대로 표현하지 못 하고, 조직 문화가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감정을 표현하도록 강요 받을 때, 우리는 "감정 노동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감정 노동자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마저 왜곡한 채 일 해야 하는 비애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지요. 





감정 노동의 폐해는 개인의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짜증나게 만드는 고객도 웃으며 응대했는데 집에서는 별것 아닌 일로 짜증 낸 경험, 누구나 한 두 번쯤 있을 겁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린 맞벌이 부부는, 퇴근 후에 부부 싸움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일에 너무 많은 감정 에너지를 소모해버려서, 사랑하는 가족을 보듬어줄 심리적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연구 결과를 보면, 감정 노동자는 그들의 자녀에게도 감정을 억누르도록 가르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직장생활, 나와 나룰 둘러싼 상황을 분리해보세


감정 노동으로 상처 입은 자존감을 구원해내는 궁극의 방법은, 일과 자신을 하나로 묶지 않고 자기 가치를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비록 회사에서는 감정에 상처 입었더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라고 자긍심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나는 자식 농사는 잘 지었다" "주말에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나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며 삶의 의미를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파울로 코엘료가 한 이 말을 음미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이 돈에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20달러 지폐니까요. 우리도 살면서 이렇게 자주 구겨지고 짓밟히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평소 남자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던 어떤 부장님은, 슬픔이나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런 약한 감정은 자기 안에 아예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정을 부정하면, 언젠가 감정 난독증이 생깁니다. 감정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저는 "감정 난독증" 이라고 부릅니다. 


감정 난독증이 있는 사람은 우울감을 느끼면 "오늘따라 유난히 술이 땡기네."라고 인식합니다. 집에서 외로움을 느끼면 "내가 밖에서 고생해서 돈 벌어 왔는데, 반찬이 왜 이 모양이냐!" 하고 아내에게 투사해 버립니다. 공허하다는 느낌을 쇼핑에 대한 욕구로 잘못 해석해서,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백화점으로 달려가 명품 구두도 사고, 멀쩡한 핸드폰을 최신형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명문 대학을 나와서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른 사람 중에서 기본적인 정서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하고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드물지 않게 봅니다. 이런 사람은 힘과 지위로 타인을 지배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신뢰 관계는 맺지 못합니다. 자기 감정조차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읽겠습니까! 감정 난독증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쉽게 무시해 버립니다. 상처를 주고도 자기가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 관계는 타인의 감정을 올바르게 읽고, 그것에 맞추어 반응하는 것이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감정은 단순히, 싫다, 좋다, 기쁘다, 슬프다 같은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상호 주관적인 현상입니다. 사회를 결속시키는 진정한 힘은 이성이 아니라, 개인 간의 감정적 결속입니다. 감정의 힘으로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종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아남아 진화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정장애가 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도 ‘느끼는 힘’을 키우지 못한 탓이 큽니다. 이성은 분석하고 비판하고 판단하지만, 결단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이성에만 의지하면 고민 속에서 계속 허우적거리게 될 뿐입니다.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는 감정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 합니다. 그곳에서 좋은 감정이 일어나는지 내면의 코나투스가 상승하는지를 느끼고, 그 느낌을 믿어야 합니다. 억압하고, 왜곡하고, 오독하지 않으면 감정은 언제나 옳은 길을 알려주는 법이니까요.



* 필진소개



  • 닥터K 김병수 교수
    현재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같은 병원 직장상담실 ‘마음지기’ 담당교수로 직원들의 스트레스와 고민을 상담하고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코너 ‘닥터K의 고민상담소’를 진행하며 많은 직장인들의 고민을 상담해왔다. 지은 책으로는 ‘버터낼 권리’, ‘마음의 사생활’, ‘심리톡톡 나를 만나는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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