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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밥상 인문학] 맛으로 떠나는 추억 여행 <프루스트 현상>



겨울이면 길거리에서 풍겨오는 붕어빵, 계란빵 그리고 군고구마 냄새 때문에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 냄새를 맡다 보면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추운 날 따뜻하게 가족, 연인과 함께 그 음식을 즐겼던 행복했던 순간들 말이죠. 그런데 코끝을 스친 냄새에 옛 기억이 문득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뇌에 향기의 추억이 새겨져 있기 때문인데, 이를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 부릅니다. 냄새가 부르는 맛의 기억, 프루스트 현상을 소개합니다.



과자에 담긴 과거의 기억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 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 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중략-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장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이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유명한 구절입니다. 성인이 되어 가는 주인공이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madeleine: 조개 모양으로 된 작은 케이크로 맛은 파운드 케이크와 비슷하고 버터와 레몬 향이 난다)를 먹은 느낌을 ‘전율’, ‘감미로운 희열’, ‘강렬한 기쁨’으로 표현하며,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는 장면입니다. 이 유명한 장면 때문에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냄새는 힘이 세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게 된 계기 역시 프루스트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고향에서 숙모가 내어주곤 했던 마들렌의 향기를 떠올렸습니다. 


머리에 펼쳐진 고향의 기억은 그가 글을 쓰도록 이끌었습니다. 프루스트는 홍차와 마들렌 과자를 먹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 아닌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 그때의 감정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과거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게 아닙니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는 프루스트 말처럼 지나간 일들은 억지로 떠올리기보다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갑자기 떠올라 나를 엄습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후각이 감정을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모넬화학감각연구센터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 박사는 향기가 뇌의 감정 영역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01년,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사진을 보여주며 냄새를 함께 맡게 했을 때가 사진만을 보여줬을 때보다 과거의 느낌을 더 잘 떠올린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어린 시절 뇌에 입력된 마들렌 과자 냄새에 대한 기억은 당시 여러 기억과 함께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냄새 기억이 자극되자 다른 기억들이 함께 연결되면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맡았던 특정한 냄새에 자극을 받아 기억하는 이러한 프루스트 현상은 후각이 한 개인의 문화적 배경과 경험, 인생을 관통해온 기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후각과 기억의 연관성 





인간은 음식을 섭취할 때 들숨을 통해 코로 냄새를 맡습니다. 또 음식을 씹을 때 냄새가 입안 뒤쪽에서 후각구로 직접 전달돼 혀가 감지한 미각 정보와 함께 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냄새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맛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냄새는 어떻게 당시 상황과 함께 저장되고, 또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걸까요? 코의 냄새 신경세포는 뇌의 변연계에 존재하는 편도체와 해마에 연결돼 있습니다. 편도체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해마는 연상 학습을 담당합니다. 


다른 감각은 이처럼 감정과 연상 학습을 담당하는 뇌 부위와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냄새만이 감정과 추억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프루스트 현상의 비밀을 뇌의 진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2009년 이스라엘의 야야 예슈런(Yaara Yeshurun) 박사는 냄새와 기억의 상관관계를 증명한 바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시각이나 청각을 통한 기억은 단기 기억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만, 후각을 통한 기억은 장기 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고, 감정적 느낌 또한 다른 감각에 비교해 더 강하게 살아납니다


“향은 기억 중추를 자극하여 우리를 시공을 초월한 더 아득한 과거 속으로 데려가곤 한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덤불 속에 감춰져 있던 지뢰처럼 기억 속에서 쾅하고 폭발한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낙엽 태우는 냄새는 군고구마를 먹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을 받던 따스한 감정이 더 생생하다. 냄새의 효과는 순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이미 감정을 자극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냄새를 인지했을 때 그 실체나 이유를 이해하기도 전에 알 수 없는 감정에 곧장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Fl avor, 맛이란 무엇인가』, 최낙언)”





모두 본인만의 추억의 음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음식을 먹거나 우연히 냄새를 맡게 되면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푸르스트 현상’을 기억해 잠시나마 과거의 행복한 추억에 빠져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