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신대리입니다.
대한민국 사무기기의 역사를 써가는 신도리코, 얼마전부터 역사특집으로 신도리코가 걸어온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고 있는데요, 이번 포스트에서는 80~90년대 내용을 여러분께 보여드리려 합니다.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아래 링크를 꼭 먼저 읽어보세요~^^
대한민국 사무자동화의 역사가 녹아있는 신도리코 역사관을 소개합니다.
1980년대는 한국 경제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시대입니다. 경제호황으로 큰 발전을 지속해나갔으며,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 개최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기도 했죠. 사무기기 시장도 1980년도 큰 변화를 맞이하는데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는 지 지금 확인해볼까요?
신도리코, 미래를 준비하다
사무기기 시장은 1980년 큰 변화에 직면합니다. 팩시밀리와 컴퓨터 등 새로운 기기들이 속속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사무환경은 더욱 능률화, 속도화 되었죠. 또한 복사기 역시 가격이 대중화되면서 사무기기 시장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시장은 과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도리코는 1980년, 창립 20주년을 맞아 제 2의 도약을 준비합니다.
미래를 위한 신도리코의 첫 번째 노력은 '연구개발기업'으로의 변화였습니다. 복사기에는 약 3,000여개의 부품이 필요합니다. 80년 당시 감광지 등 소모품 부문에서는 상당한 국산화가 이루어졌지만, 핵심 수입 부품은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신도리코는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부품 국산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신도리코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세렌감광체 개발에 성공합니다.
<1980년대, 세렌감광체 양산 모습>
이후에도 신도리코는 연구개발을 위한 투자를 지속했으며, 1981년 3월에는 마스터 페어퍼와 DT 토너 개발에 성공, 이후 84년에는 수입용지 시장을 압도하고 국내 인쇄 시장 점유율의 90%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과 뒤에는 신도리코 기술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는데요, 1982년 7월 업계 최초의 기술연구소를 설립합니다. 해를 거듭할 수록 기술연구소는 규모가 커져나갔는데요, 당시 생산/지원을 포함한 전체 인원이 500명인 가운데 기술인력이 100명을 상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통신혁명의 시작, 최초의 팩시밀리 개발
신도리코가 첨단 기술력을 증명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국산 팩시밀리의 개발입니다. 지금은 사무기기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당시 팩시밀리는 귀한 기기였습니다. 국내의 팩시밀리 역사는 신도리코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요, 그 이유는 체신부 주도의 팩시밀리 규격화 작업에 신도리코가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1981년 1월, 팩시밀리 개발 TFT가 구성되었고, 그해 12월, 신도리코는 국내 최초의 팩시밀리 'FAX 3300H'개발에 성공합니다. 이 제품은 원고를 40초 내에 어느 곳이나 전송할 수 있으며, 복사기로도 활용이 가능한 제품입니다.
<신도리코가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팩시밀리 'FAX 3300H'>
이 제품은 우수한 품질에 힘입어 날개돋친 듯이 판매되었는데요, 매일 아침 성수동공장에는 이 제품을 구하려는 특약점 사장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팩시밀리 개발로 신도리코는 복사기에 이어 가장 앞선 기술력을 자랑하는 사무기기 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
한국경제는 1982년부터 고도성장의 길을 열기 시작했고, 이와 때를 맞춰 신도리코 역시 큰 폭의 성장을 거듭해갑니다. 신도리코는 성수동 공장만으로 급증하는 시장의 수요를 충당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1983년, 아산(당시 지역명은 온양)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합니다.
<1983.07.31, 신도리코 아산공장>
1985년 1월, 아산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으며, 첨단화, 자동화 설비를 갖춘 아산공장은 지속적인 확장을 통해 신도리코의 첨단 생산기지로서의 훌륭한 역활을 담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사무기기자동화가 전국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면서 지방 수요가 늘어나자 신도리코는 팩시밀리가 판매신장을 보이고, 신기종 복사기들이 출현하던 1984년부터 지방지사 개설을 시작합니다. 지사는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동경에도 지사를 설치하여 네트워크 구축에 앞장섰습니다.
아산공장, 지방지사의 개설, 그리고 우수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신도리코는 소터(sorter)를 필두로 해외 수출을 시작합니다. 1985년 세계적인 기술기업 그라드코로 첫 소터 수출을 개시합니다. 이후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는 신도리코 제품은 리코, 3M, 제록스, 미놀타 등 세계 유슈의 복사기 제조업체에 장착됩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수출 천만불을 달성하며,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천만 불 수출의 탑을 수여받게됩니다.
1986년에는 우석형 부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해이기도 합니다. 글로벌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딪은 신도리코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죠. 수출 호조와 시장 확대로 점점 세를 키워가는 신도리코는 1990년대를 준비합니다.
글로벌 신도리코를 향하여
1990년대 초반, 무한 기술 경쟁, 확대된 세계 시장, 정보화 등으로 사무기기 사업은 급성장을 시작합니다. 신도리코는 그동안의 축적해온 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1991년 국내 최초로 독자설계 복사기 FT 1000개발에 성공합니다. 복사기는 정밀 광학과 전기, 전자, 기계 등 고도의 융합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복사기 독자 개발에 성공한 나라는 극히 드뭅니다. 이는 신도리코의 기술수준이 세계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죠.
<신도리코가 독자 설계, 생산한 건식 복사기 FT 1000>
이후 1992년 초소형 복합기 M50으로 시작하여 경제형 다기능 복합기 NT 2040, 소형 복사기 NT 2080, 팩스겸용 복사기 My copy 1000, 중대형 복사기 등으로 이어진 신도리코의 개발 제품들은 세계 시장에 성공적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신도리코는 기술연구소를 증축하여 환경실험실, 무향측정실, 환경실험실 등 첨단 설비와 휴식공간을 배치, 연구환경을 크게 개선했습니다.
<1992.03, 증축된 신도리코 기술연구소>
신도리코는 제조업의 경쟁력인 QCD(Quality, Cost, Delivery) 각 부문에서 앞선 전략을 구사하며 수출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1990년 6월, 미국지사 개설, 1996년 10월 홍콩지사를 개소함으로써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나갑니다.
세계 최초 자동잼제거 복사기 NT 4000
1993년이 시작되면서 복사기 시장은 치열한 경쟁이 있었습니다. 각 기업들이 신제품을 대거 출시하였고 소비자들은 제품의 성능과 가격 등 질적인 차원에서 제품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죠. 신도리코는 가격은 물론, 품질의 혁신을 추구한다는 방침 아래 신제품 개발에 돌입했으며, 국내 고객은 물론, 해외 시장의 소비자들까지 염두에 두고 복사기의 내구성 강화와 불편사항 해소에 역점을 두고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1994.07, 세계 최초의 자동잼제거 복사기 NT 4000 시리즈>
1994년 7월 1일, NT 4000 시리즈가 시장에 출시되었습니다. 이 제품은 기존의 제품과는 다른 특장점이 있었다. 복사기의 가장 큰 불편사항이었던 용지걸림을 자동으로 제거하는 기능이 세계 최초로 장착되었기 때문이죠. NT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국내에서 출시된 수백 종의 복사기 중에 NT 시리즈가 전체 판매대수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시장을 석권했죠. 그리고 48개국으로 수출되어 국내외 모두에서 크게 인정받게 되었는데요, 이 제품은 우수한 기술력 덕분에 각종수상의 영예도 도맡았습니다. 이 시리즈가 수상한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4년 신산업경영원 선정 올해의 뉴미디어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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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제품 개발 외에도 신도리코는 1990년대 차별화된 고객감동을 구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서비스센터를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강남, 중부, 부산 등 전국 13개 지역에 서비스센터를 확대, 설치했습니다. 또한 1995년에는 전국 서비스사원을 대상으로 서비스 기술아카데미를 개설합니다. 연간 200여 강좌가 열렸고, 3,900여명의 수강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고객 AS를 수행해 나갑니다. 이러한 고객만족을 위한 서비스 혁신으로 1995년에는 정부로 부터 AS마크를 받기도 했습니다.
1995년은 신도리코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첫 번째는 우상기 회장의 금탑산업훈장 수훈입니다. 금탑산업훈장은 기업인에게는 최고의 영광으로 지난 공로에 대한 정보의 감사가 담겨있습니다. 신도리코가 걸오온 35년에 대한 대외적인 호평이죠.
<1995.03.15, 제 22회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 우상기 회장>
두 번째는 1억 불 수출의 탑 수상입니다. 1억 불 수출의 탑 수상은 사무기기 업계에서는 최초의 일로 신도리코의 우수한 기술력과 수출역량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상을 수상으로 신도리코가 국내에서 제일의 사무기기 기업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죠.
1997년, 국내기업의 잇단 부도로 금융권의 위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나라 경제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됩니다. 국내 경제의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죠. 사무기기 업계도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요, 신도리코는 내수 부진을 수출로 극복하며 1998년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356억원의 순이익을 거둡니다.
서울본사 리노베이션과 아산공장 증축
1997년 7월 7일, 성수동 사옥과 서울공장의 증/개축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 공사는 설계는 민혁식 교수가 담당하였는데, 인간 중심의 건축, 첨단화된 생산라인 건축을 목표했고 우석형 사장은 사람, 제품의 동선과 생산/사무/물류/문화/휴식/스포츠를 총 망라하는 새로운 개념의 건축을 계획했습니다.
<1999. 07.07, 신도리코 서울본사 신사옥 준공식>
성수동 사옥은 사원들에게 쾌적한 환경과 신바람나는 일터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리노베이션되었습니다. 특히 국제규격의 농구장과 체력 단련실, 직원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마련된 사내 갤러리, 옥상정원 등은 사무공간의 기능을 넘어 휴게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부여해주었습니다.
<신도리코 서울본사 신사옥 전경>
아산공장 역시 1999년 레이저 프린터 생산을 위해 증축이 시작됩니다. 설계는 신도리코의 건축 역사를 만들어온 민현식 교수가 맡았습니다. 신축 생산동은 땅의 고저차가 10m가 넘는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민교수는 기울어진 경사면을 아산공장 증축동의 3개 층 모두를 지면과 만나도록 설계하여 물류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했습니다. 복리후생을 위해 체육관과 갤러리도 건축되었으며, 건물 뒷편에는 야외극장을 만들어 공장의 활기를 도모했습니다.
사무기기 역사의 별이 지다
2000년 3월 17일에는 신도리코의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우상기 회장의 영면이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그였기에 남은 사람들의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
<가헌 우상기 회장 영결식>
많은 언론들이 우상기 회장의 타계를 보도했고, 3월 20일에는 한국경제에서 가헌의 영면을 논평했습니다. 언론의 사설에서 고인을 기린 예는 흔치 않은 것입니다.
자산 4,953억 원, 매출 3,700억 원, 차입금 0원. 지난 3월 17일 타계한 가헌 우상기 회장이 이끌어 온 신도리코는 바로 이런 회사다. 1919년 개성에서 태어나 1939년 개성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60년 신도리코의 전신인 신도교역을 설립, 복사기 등 사무기기 생산에 뛰어들었던그의기업이념은삼애정신이었다.
‘ 나라와직장과사람을사랑한다’는 삼애정신은 기업의 경쟁력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 우회장의 확고한 경영철학이었다. 기업이 남긴 이익을 회사와 주주와 종업원에게 각각 30%씩 배분하고 나머지 10%를 공익사업에 쓰는 3:3:3:1 원칙을 철저히 실천에 옮김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창업 이후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 가 없었던 것과 1997년 IMF 때 인원감축을 하지 않았던 사례도 이 같은 삼애정신의 결실이었다.
개성상인의 후예답게 한 우물 파기의 집념과 개척정신을 보인 것은 많은 기업들이 차입에 의존한 문어발식 경영을 꾀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40여 년간 복사기/팩시밀리/프린터 등 사무자동화기기의 개발과 생산에만 전념했고, 국내 시장에서 외국의 유수한 기업과 경쟁하여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의 위상을 굳건히 지킨 것은 끈질긴 집념과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한 우물을 파면서도 한 번도 적자를 내 본 적이 없다. IMF 이후 무차입 경영 기업이 늘고 있지만, 신도리코야말로 그 원조격인 회사라고도 할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개성상인다운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기술개발에대한강한열정은아무리높이평가해도지나침이없다. 1980년부터 전체 직원의 20%를 기술연구소에 배치해 신제품 개발에 심혈을 쏟아온 것은 기업생존의 원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선각자적인 통찰력이라 고 할 수 있다. 우회장은 스스로 특허기술을 개발하기도 했고, 가헌과학기술재단을 설립해 기술인력 양성에 진력함으로써‘기술력만이 기업의 살 길’이란 생생한 교훈을 몸소 실천을 통해 남겼다. 고인이 남긴 개척정신, 성실과 신용을 중시하는 기업가정신, 선택과 집중이 분명한 경영철학 은 새로운 투자처와 활로모색에 고민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기업들에 훌륭한 표상으로 길이 남으리라 믿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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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1980년~90년대의 역사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2000년대 이후의 내용을 알려드릴께요~^^ 신대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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