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리코가 걸어온 지난 61년을 함께 되돌아보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상을 살펴보는 [Start, New Sindoh]! 오늘은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달에는 현재와 미래를 선도하는 신도리코의 글로벌 디자인과 3D 프린터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이어서 오늘은 신도리코의 역사, 그 중에서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신도리코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7월 7일, 오늘날 신도리코의 전신인 신도교역(新都交易)이 창립하면서 국내에 사무기기가 도입될 수 있었던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무 자동화의 개념이 생소하던 60년대 우상기 선대회장은 복사기의 미래를 예견하며 적극적으로 사업에 전념했는데요. 이 때 신도는 복사기의 효율성을 알리기 위해 상설 전시를 진행하는 한편 제조업의 기틀을 마련해 갔습니다. 1964년 드디어 국내 최초의 복사기가 탄생하며 신도리코는 사무자동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1960’s 사무기기의 도입

 

Since 1960, 신도교역의 창립

 

1960년 7월 7일 가헌 우상기 선대회장은 신도의 모태인 신도교역 주식회사를 자본금 5,000만 환으로 설립했습니다. 서울 중구 소공동 79번지 갱생빌딩 301호에 터를 잡은 신도교역의 임직원은 19명이었는데 당시로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신도교역(新都交易) 설립 1960.7.7

 

우상기 선대회장이 복사기 사업의 가능성을 엿본 것은 1959년 말이었습니다. 당시 수산물과 문구류를 수입해 판매하는 무역회사 성호실업을 운영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새로운 사업 정보를 얻기 위해 지인이 근무하는 산업은행 조사부 사무실을 방문했고, ‘10분이면 50매를 복사한다’는 일본신문에 실린 복사기 광고를 접한 순간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복사기 수입 판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복사기는 수입 규제 품목이라 절차가 까다로웠고 자동차 1대 값에 버금가는 고가의 제품이라 수입자금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수입방법을 찾고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 투자자도 찾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확실한 비전에 공감한 투자자가 나타나고, 1960년 5월 26일 제10차 무역위원회가 수입허가품목을 대폭 늘리면서 1960년 7월 1일부터 복사기 수입이 가능 해졌습니다. 우상기 선대회장은 기존 사업체 정리와 함께 1960년 7월 7일 신도교역을 창립하며 복사기 사업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에게 복사기 사업은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얻은 ‘사업가의 감’으로 찾아낸 미래였습니다. 신도교역은 불혹을 넘긴 그에게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성공할 수밖에 없는’ 승부수였습니다. 신도교역이라는 사명에도 남다른 각오가 담겼는데 개성상인의 사혼상재(士魂商才) 정신을 새로운 송도(松都) 서울에서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신도(新都)로 붙였다고 합니다.

 

이어 일본 이연광학으로부터 RICOPY 505 복사기를 수입하고 1959년에 새롭게 문을 연 미우만백화점(현 롯데 영프라자) 1층에 전시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한 첨단 사무기기’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집 한 채 값’에 달하는 가격이 대중화에 걸림돌이었습니다. 성장하는 경제 규모와 늘어나는 각종 증명서 발급으로 수요가 생겨나고 있었지만 단시간에 사업의 진척속도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미우만백화점 1층 전시를 통해 복사기의 효용성과 효율성을 널리 알렸고 상담 신청도 많았지만 창업 첫 해 신도교역은 한 대의 복사기를 파는 데 그쳤습니다. 신도교역은 내일을 기약하며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미우만백화점 1층에 설치된 신도교역의 복사기 전시장. (1960.8)

 

 

▲미우만백화점 1층에 설치된 RICOPY 505. (1960)

 

 

신문물을 알리며

 

신도교역은 새로운 수요 창출을 위해 적극적인 홍보를 시작했습니다. 1961년 4월 미도파백화점 3층에 사무실 겸 상설전시장을 추가로 열고 본격적인 영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가격장벽에 가로막혀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자 기존의 공급방식을 바꿔 가격을 낮출 계획을 세웠고 직수입하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우상기 선대회장은 1962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제조사인 이연광학의 창업주 이치무라 기요시를 만나 한국총판 계약을 체결하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울러 용지 및 기계 생산에 대한 기술지원 약속까지 받아내 돈독한 파트너로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가격이 낮아지자 바로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1962년 서울 13개 구청에 복사기를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구청에 공급된 복사기는 호적증명서 발급에 사용됐는데 신속한 업무처리 속도로 공무원은 물론 민원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계기로 복사기는 실생활에 유용한 사무기기로 인정을 받게 됐습니다. 아울러 신도교역의 복사기를 통해 우리나라 정부의 행정업무가 한 단계 높아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했고 이는 신도교역이 우리나라 사무자동화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연광학과의 복사기 사업 파트너십 계약. (1962)

 

▲관공서 복사기 도입으로 호적사무자동화 시대 개막. (1962.8)

 

감광지로 연 신기원

 

신도교역은 부산출장소를 개설해 사업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수입 판매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제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는데요. 첫 단계로 주변 소모품 사업에 먼저 진출했습니다. 당시 보급된 청사진 복사기는 감광지와 현상액이 필수 소모품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사기 판매는 지속적인 소모품 공급으로 이어져 새로운 수익모델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신도교역은 비교적 기술 도입이 쉬운 감광지와 현상액 개발에 착수했고 파트너인 이연광학의 도움을 받아 밤낮없이 노력했습니다. 개발착수 2개월 만인 1964년 1월 신도교역의 첫 제품인 청사진 복사기용 감광지 KD-B4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어 4월에는 현상액 생산도 시작했습니다. 생산된 제품은 마포구청, 서대문구청을 필두로 관공서 등에 판매했고 호적 사무자동화가 시행되면서 그 수요는 품귀현상을 빚을 만큼 폭증했습니다. 감광지는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1964년 4월 서울시 공산품 생산장려위원회로부터 우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국내 최초의 복사기

 

감광지와 현상액 생산 성공에 고무된 신도교역은 1964년 8월 국산 복사기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처음 발표되며 국가적으로 산업화에 대한 의지가 강하던 시기로 신도교역은 우수한 기술인력을 보강해 최첨단 기기 생산을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1964년 12월 국내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조달청을 대상으로 한 시연회에서도 합격점을 받아 1964년 12월 30일 조달청에 납품하기도 했습니다. 국산화에 성공한 신도교역의 복사기는 시장에서 환영을 받았고 각종 전시회에 출품되어 대중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때 신도교역을 ‘복사기 전문기업’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포공장에서의 우상기 선대회장 (1965.5)

 

대량생산과 판매법인 설립

 

신도교역은 늘어날 수요에 대비해 생산기지 확장에 나섰습니다. 1965년 11월 성동구 하왕십리 844번지에 3층짜리 공장을 매입했습니다. 새 공장은 기존 설비에 더해 신형 선반, 전기용접기, 신형 재단기 등을 추가로 설치하며 생산성도 높였습니다. 미래에 대비한 준비로 1965년 말 정부 행정업무 효율화가 진행되어 조달청, 체신부 등 각 정부 부처에서 복사기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회사는 1966년 208%, 1967년 171%의 경이적인 매출 성장률을 기록해 나갔습니다. 사세가 확장되자 1967년 6월 1일 영업과 고객 관리를 담당할 신도사무기판매㈜를 설립했습니다. 복사기의 개발, 생산과 수입은 신도교역이 전담하고 영업과 AS는 신도사무기판매가 담당하는 이원화 체제를 꾸렸습니다. 전략적으로 영업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단 기간에 복사기 시장점유율을 높여 나갔습니다. 신도사무기판매는 복사기 외에도 일본의 다양한 사무기기 회사인 후지필름, 미쓰비시, 히라카와 등과 업무제휴를 맺고 윤전등사기, 마이크로필름시스템, 투시투영기 등 다양한 사무기기도 수입 판매했습니다. 영업사원들은 관공서와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과 시연회를 개최해 판로를 확장하는 것은 물론 고객민원을 해결하는 서비스 요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전자식 복사기 BS-1 생산라인 (1969.12)

 

전자식 복사기 생산

 

신도교역은 청사진 복사기 Ricopy 555 출시 이후 1966년에는 전자식 복사기를 수입 판매했습니다. 이후 1967년 7월에는 신형 청사진 복사기 ST 680 생산에 성공했고, 이를 발판으로 전자식 복사기 생산 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6개월의 노력 끝에 전자복사기 BS-1 생산에 성공했고 1969년 11월 최초의 국산 전자식 복사기로 출시되었습니다. 이 제품은 청와대에서 단독 시연회를 열며 더 큰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1969년 12월 10일 우량공산품장려위원회에서 우수품으로 선정되고 전국상품전시회에서 상공부장관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BS-1에 이어 성능이 개선된 BS-2가 1970년에 등장하는 등 국내 최고의 복사기 전문기업으로서 신도의 자부심도 커져 갔습니다.

 

1970’s 신도리코의 출범

 

 

▲성수동본사 및 공장 준공식

 

신도리코의 출범과 성수동 시대

 

1970년 3월 28일 신도교역은 일본 사무기기 전문업체인 리코(전 이연광학)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주식회사 신도리코로 사명을 바꿨습니다. 1971년에는 현재의 성수동터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하며 늘어나는 복사기 수요를 대비했습니다. 성수동공장 준공은 전자복사기의 대량 생산체제를 갖췄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신도리코는 첨단기업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다양한 전시활동을 펼쳤고 1975년에는 국내 최초 보통용지 복사기를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품질 경영과 기업문화

 

신도리코는 첨단 사무기기 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기업 이미지와 인지도 향상을 위해 상호, 상표의 통일된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내부적 결속과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는 조치로 ‘신도리코인의 생활신조’를 제정, 공표했습니다. 생활신조는 세 가지로 ‘첫째, 우리는 일에 충실하여 나를 향상시킨다. 둘째, 우리는 품질을 높임으로써 회사를 발전시킨다. 셋째, 우리는 사업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한다.’ 입니다. 실제 신도리코는 일찍이 회사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시작해 1973년 5월 ‘신도리코장학회’를 출범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조국에서 유능한 인재들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의 길을 중단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본 우상기 선대회장은 장학사업에 대한 뜻을 세웠고 기업이 안정화되자 바로 이를 실천했습니다. 1984년 5월에는 기술개발을 위해 과학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가헌과학기술재단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가헌과학기술재단과 신도리코장학회는 2004년 가헌신도리코재단으로 합쳐져 현재도 과학인재 육성 및 장학사업을 위한 지원을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업구조가 대량유통 체재로 갖춰지며 신도리코는 사무기기 종합기업으로서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매출 또한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신도리코는 1971년부터 ‘신도리코 비즈니스 머신쇼’를 개최해 첨단 사무기기 기업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신도리코는 기업의 성장과 함께 기업문화 조성에도 힘을 기울였는데요. ‘인성과 능력의 균형’이라는 기준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 임직원 대상 직무교육, 인성교육, 기업의 가치관 교육을 시행해 인재 육성을 위해서도 노력했다고 합니다.

 

생산 부문에서도 체계적인 품질관리 활동을 도입했습니다. QC(Quality Control) 활동의 첫 단계로 작업지시서, 주문지 등 각종 서류를 표준화했습니다. 또 각종 업무 매뉴얼을 제작해 직원들이 숙지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문제 발생 시, 불량의 원인을 찾고 오류를 수정해 업무개선으로 연결하고 제품의 품질 수준을 향상시켰습니다. 회사의 업무 표준 개선을 위해 직원들이 참여하는 제안제도도 1970년대 초에 도입한 것입니다. 품질 개선 활동이 성과를 내며 분임조 활동도 활발히 전개됐고 1976년에는 제1회 품질관리 분임조 경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최초의 보통용지 복사기 DT 1200

 

보통용지 복사기 개발

 

1962년부터 시작되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 키워드는 ‘수출’이었습니다. 신도리코 역시 동참하기 위해 수입해 판매하던 전자계산기를 자체 개발해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국내에서 전자계산기를 생산하던 업체가 없던 상황에서 관련 기술 확보를 위해 1973년 8월 일본에 기술인력을 파견했고 생산설비를 갖춰 나갔습니다. 전자계산기는 수출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회사 최초의 수출 제품이자 국내 최초로 개발된 전자계산기는 이후로도 성능을 점차 개선해 후속모델을 내놓았고, 그러자 1976년까지 수출물량과 대상국도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한편 1977년에는 복사기의 중요 부품인 메인하네스(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전선)를 수출하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보통용지 복사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보통용지 복사기는 일반용지를 복사지로도 사용할 수 있었기에 보통용지 복사기는 시장의 주류로 성장할 여지가 높았습니다. 1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75년 국내 최초 보통용지 복사기 DT 1200 생산에 성공했고 사전예약으로 전량 판매되는 기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1975년 11월 제6회 한국전자전에서 DT 1200의 성능에 감탄한 대통령이 즉석에서 복사기 1대를 구매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보통용지 복사기는 비상하던 신도리코에 강한 원동력이 되었고 1977년에는 신도리코의 보통용지 복사기가 국내 복사기 시장의 85%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DT 1800, DT 5700 등 후속 신제품을 연달아 내놓으며 보통용지 복사기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보통용지 복사기의 핵심 부품인 감광체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보통용지 복사기에 사용되는 세렌(Selenium) 감광체는 정교한 부품이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신도리코는 1979년 초 기술개발 TFT를 출범하고 기술자료 확보를 위해 일본에 기술진을 파견했습니다. 7개월만에 국산화에 성공했고 이에 신도리코는 국산화 자립도를 더욱 높일 수 있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1979년 7월 감광체공장 건설에 착공해 완공 후 연간 24,000본의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전자 복사기 전시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는 임직원

 

영업인의 자부심

 

1970년대는 제조업이 활발해지고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케팅의 필요성이 새롭게 대두되던 시기로 신도리코 또한 사무기기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을 진행했습니다. 1971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사무기기 단독 전시회를 개최했고 1974년 미도파백화점에서 진행한 사무기기 종합전시회에서는 국내 최초로 ‘팩시밀리’를 전시하며 사무환경 혁신을 다시 한번 대중에게 소개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기업 이미지를 위한 표준작업도 진행되며 옐로우, 블루, 레드, 화이트로 구성된 인상적인 마크와 한글, 영문 상호명 서체 및 심볼마크를 정비했습니다. 1974년 2월 신도사무기 판매주식회사는 신도사무기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고 신입 영업사원들에게 회사와 영업 직종에 대한 자긍심을 심는 데 주력했습니다. 최고의 시설에서 교육이 이뤄졌고 최고의 강사진이 지도했으며 수트와 넥타이, 헤어 스타일, 구두 등 잘 정돈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복장도 엄격히 했습니다. 영업사원 대상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도 신도리코가 최초였습니다. 일본이 주요 연수 대상국이었는데 영업사원들을 숙련된 전문가로 발 돋움 시킬 수 있도록 역량 향상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도사무기는 판매 제품의 유지, 관리, 보수에 일괄 책임을 지는 MIRAN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사무기기에 대해 5년 동안 모든 소모품을 무료로 제공하고 사용 빈도에 따른 일정 사용료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 방식은 대량 복사 업무가 많은 업체에서 특히 선호해 대량 납품이 가능 해졌습니다. 영업사원은 복사기나 전자 사무기기 설치 시 사무실 사용자를 대상으로 시연하고 사용법을 강습하고 간단한 이상 발생에 대한 처치 요령까지도 강의했습니다.

 

▲우상기 선대회장, 새마을훈장 협동장 수훈

 

다양한 수상

 

건실한 발전 속에서 다양한 수상도 이어졌습니다. 신도리코는 1975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생산성본부가 수여하는 한국의 기업 생산성을 8년 연속 수상했고, 1976년에는 노사협진증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습니다. 우상기 선대회장이 새마을훈장 협동장 1977년과 한국의 경영자상 1978년을 수상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신도리코는 당시 정부가 장려한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모범 기업이었고 ‘근면, 자조, 협동’을 공장 새마을운동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습니다. 깨끗한 환경을 추구하는 기업문화나 품질을 위한 QC활동도 이러한 운동의 영향으로 탄력을 받았습니다.

 

1980’s 복사기와 팩시밀리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도리코는 성장을 거듭하며 기술, 생산, 영업 등 전사적으로 가시적인 결실을 맺었습니다. 복사기에 이어 팩시밀리의 국산화에도 성공하며 1983년 아산공장 완공으로 늘어나는 수요를 대처했습니다. 국내 영업 부문에서는 전국 각 지역의 지사 설립으로 고객접근성을 강화했고 해외 영업 부문에서는 소터 대규모 수출로 사세를 확장했습니다. 이후 1986년에는 경영체제를 개편해 더 큰 도약을 준비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팩시밀리 FAX 3300H

 

▲국산 팩시밀리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전시 출품

 

팩시밀리 출시

 

팩시밀리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기의 출현은 복사기 시장이 더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신도리코는 창립 20주년 ‘새로운 도전’을 천명하고 기술 개발과 수출 기반 확보를 선결 과제로 내걸었습니다. 신도리코는 기술개발과 국산화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전략 아래 다양한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미 1980년부터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세렌드럼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복사기 시장에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1981년 3월 인쇄용원지를 특수가공한 옵셋 인쇄제판 용지 마스터 페이퍼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아울러 같은 달 DT 토너 개발에도 성공했습니다. 마스터 페이퍼와 DT토너는 본격적으로 양산이 진행되며 시장에서의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신도리코는 국내 부품업체들의 기술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판단했고 1980년대 초반부터 협력업체들의 해외 기술 견학을 지원했습니다.

 

신도리코는 마침내 1981년 12월 국내 최초 팩시밀리 FAX 3300H를 개발했습니다. 신도리코의 팩시밀리는 원고를 40초 이내에 국내 어느 곳이나 전송할 수 있었고, 종전의 전화나 텔렉스, 우편 등의 통신수단의 단점을 보완하는 획기적인 제품이었습니다. 또한, 국제규격을 갖춰 세계 어느 곳의 팩시밀리와도 송・수신이 가능했으며, 자체 복사 기능도 더해져 복사기로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신도리코의 팩시밀리는 생산 즉시 국내 유일의 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공사 전국 방송기지에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업계 최초 기술연구소 설립

 

기술연구소 설립과 아산공장 준공

 

기술 개발의 성과에 고무된 신도리코는 창립 22주년을 맞은 1982년 7월 업계 최초 기술연구소를 개소했습니다. 서울본사 내에 160평 규모로 설치된 기술연구소에는 14명의 전문인력을 배치했고 연구원들은 우선적으로 복사기 부품, PCB인쇄회로기판, 팩시밀리, 컴퓨터, 복사기 등을 개발했습니다. 아울러 각종 사무기기 제품개발 연구도 병행했습니다. 기존에는 생산본부에서 담당하던 개발기능이 전문적인 기술연구소 설립으로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이로써 신도는 제조업체의 A to Z라고 할 수 있는 개발-생산-영업을 모두 갖춘 체제를 완성했습니다. 기술연구소는 확장을 거듭하다 1992년 현재처럼 독립된 건물을 갖추게 되었고, 기업연구소가 아직 드물던 시절, 신도리코는 연구개발을 통해 공격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습니다.

 

성수동공장의 과밀화를 해소하고 성장에 대비하기 위해 1978년부터 제2공장 부지 선정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답사 끝에 아산(당시 충남 온양시 남동 118번지)에 있는 175,000㎡의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1983년 7월 아산공장의 첫 제조동이 만들어지고 1985년 1월부터 제품을 양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산공장은 당시 세계 3대 토너공장으로 불리울만큼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토너공장 가동 이후 신도리코는 아산 부지에 2단계 건설공사를 착수해 1985년 대규모의 제조공장과 별도의 직원 기숙사를 완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복사기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었고, 기숙사 완공으로 직원 복지도 높아져 근무에 집중할 여건을 갖췄습니다. 복사기 완제품 생산 역량까지 갖춘 아산공장은 빠르게 성수동 공장을 대체했습니다. 1987년 11월에는 대규모의 인쇄용지와 복사용지를 생산하는 공장을 준공했습니다.

 

▲아산공장 마스터 페이퍼 생산라인

 

전국지사 설립

 

1980년대에 접어들며 전시회 참가가 더욱 활발해져 신도리코의 기술기업 이미지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OA(Office Automation)기기 수요 폭발’이라는 1986년 6월 매일경제 기사는 당시 분위기와 신도리코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81년 전국의 영업 파트너들이 57개가 될 정도로 국내 영업망이 확장됐으며 계속 늘어남에 따라 보다 체계적으로 전국의 영업과 서비스망을 관리하기 위해 지방 지사들을 만들었습니다. 판매와 생산의 원활한 흐름이 이어지면서 신도리코는 지방 지사 설립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84년 6월 호남지사를 비롯해 충청지사, 경북지사를 연이어 개소하면서 지속적인 매출관리와 신속한 업무처리를 통해 시장점유율을 높였습니다. 1985년 9월에는 경남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88년 7월 경기와 강원 지역을 아우르는 경강지사를, 1989년 6월에는 서울지사를, 1990년 8월에는 전북지사를 설립해 전국적인 판매거점과 서비스망을 구축했습니다. 이와 함께 회사는 1984년 2월 일본 도쿄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기술 협의와 부품 수급을 담당했습니다. 내수시장의 성장과 수출 확대가 이어지면서 수급 부품의 증가에 따라 동경사무소는 1985년 7월 동경지사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미국의 세계적 기술기업 그라드코(Gradco)와 수출 계약 체결

 

수출, 세계로 가다

 

전자계산기, 감광체, 마스터 페이퍼, 토너 등을 수출하며 경험을 쌓은 신도리코는 점차 핵심부품 수출로 눈을 돌렸습니다. 유럽과 미주 지역 구매자를 대상으로 복사기와 주변기기 수출을 위해 다각적으로 접촉했고, 끝없는 상담의 결실로 1984년 12월 미국의 세계적 기술기업 그라드코(Gradco)와 복사기 주변기기인 소터(Sorter) 수출계약을 체결했습니다. 1985년 2월에는 그라드코 전담사업부 성격을 띤 그라드코 코리아(Gradco Korea)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3개월 뒤 성수동공장 내에 4,620㎡의 소터공장을 준공해 수출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7월에는 수출용 소터에 미국 UL 마크를 획득했습니다. 이어 캐나다 CSA 마크, 영국의 BSI 마크, 독일의 TUV 마크 등 공업 선진국들의 품질 안전 규격 마크를 획득함으로써 수출 기본 조건을 갖춰 나갔습니다. 신도리코는 1985년 소터 수출 첫해 1,000만 달러 수출 실적을 달성했으며, 1986년 7월에는 자체 개발한 소터 SS-1를 미국·영국·일본에서 특허 출원하는 개가도 올렸습니다. 대량생산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설비와 프로세스가 개선되었고, MRP(Material Requirement Planning, 자재소요계획)를 도입해 생산현장의 품질과 효율을 동시에 높였습니다. 신도리코는 소터 수출을 통해 1986년 1천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신도리코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높은 비중이었습니다. 수출은 계속됐고 1987년 독자개발한 프린터 급지용 피더(Feeder)와 1989년에 인쇄기 소모품인 마스터 페이퍼를 수출하여 품목을 다각화했습니다.

 

한편, 이 시기 신도리코 구성원 모두는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루면서 세계시장에서 보다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연구개발에 대한 명확한 목표와 변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 속에서 경영 지원도 강화되었으며, 새로운 리더십을 갖춘 신도리코는 서울본사에 새로운 사옥 건설도 착수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9층의 사무동이 1986년 10월 완공되었고, IBM 전산시스템을 도입하고 연구소 설비와 장비도 대거 확충했습니다. 1988년 사무기기 임대와 판매, 토털 마케팅 기업 신도시스템을 설립한 데 이어 1989년 은행순번기 등 틈새시장을 선점한 신도테크노와 중소기업 창업투자 전문업체 신도창업투자, 한국 IBM과 합작한 신도컴퓨터를 차례로 설립하며 경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갔습니다. 사업규모 확대와 관계회사를 연이어 설립하면서 업무 공간이 부족함에 따라 1989년에는 강남구 대치동에 별도의 신사옥을 마련했습니다. 1989년 4월 완공된 강남사옥은 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준공식을 치렀습니다.

 

최신식 빌딩 시스템을 갖춘 지하 3층, 지상 11층 규모의 아름다운 건축 외관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고, 그해 서울시로부터 아름다운 건축물 은상을 받았습니다. 강남 신사옥은 신도사무기, 신도시스템 등 관계사들이 입주했습니다. 이 시기 개발, 생산 부문의 인프라도 계속 확장했습니다. 1985년에는 아산에 부품공장과 제조공장을 준공했고, 기숙사 설악관도 준공했습니다. 1987년에는 아산의 소모품 제조공장과 토너공장을 증축했습니다. 1988년에는 서울 기술연구소 증축공사를 마쳤고, 1989년에는 아산공장 증축공사를 완료했다.

 

▲아산 공장 준공

 

다양한 히트상품

 

아산공장에는 1986년 성수동공장의 전장품 제조부가 이전한 데 이어 1987년에는 소모품과 토너 생산도 이전했습니다. 1989년에는 성수동공장의 기계제조부를 이전했습니다. 이로써 아산공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무기기 제조공장으로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인프라가 단단해지면서 다양한 히트상품도 탄생했습니다. 1986년 FT 4070 복사기, 첨단시스템 복사기 FT 5510, 고속 팩시밀리 FAX 210, FAX 210S 등이 선보였고, 1987년에는 팩시밀리 대중화를 위한 혁신적 보급형 기종 FAX 200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100만 원대의 가격으로 출시된 이 제품은 팩시밀리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1989년에도 보급형 돌풍이 이어져 보 급형 팩시밀리 K-20과 가격 대비 효율성을 갖춘 습식복사기 100이 시장을 공략한 것을 필두로 고속 복사기인 DT 5300S를 내놓았습니다. 이와 함께 국내시장에서 첨단 사무기기인 워드프로세스 2개 기종을 도입·판매했습니다. 경제 호황기를 맞은 1980년대 신도리코는 국내 매출과 수출 모든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장을 거듭해 나갔습니다. 신도리코는 국가 및 여러 단체가 주관한 각종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1985년 은탑산업훈장, 1986년 수출진흥 산업포장, 1988년 신산업 경영대상을 수상하며 사회적 발전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86년 신도리코가 받은 일천만불 수출의 탑은 이 때를 대표하는 수상이었습니다.

 

오늘은 정말 과거 속으로 시간여행을 하 듯 신도가 지금까지 어떻게 발전해왔고 어떤 성과들을 이뤄왔는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신도리코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는데요. 흠뻑 빠져들 만큼 정말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그 이후 9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신도리코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그럼 다음에도 유익한 이야기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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